상식과 사회학적 설명
와츠-스트로가츠 모형으로 유명한 와츠의 Common Sense and Sociological Explanations (2014)을 아래에 정리했다. 사회학적 설명, 혹은 보다 넓게 말하자면 사회 혹은 사회현상에 대해서 우리가 설명할 때 자주 범하는 문제들이 잘 정리되어 있는 논문이라고 본다.
상식을 통한 설명이나 이론을 기꺼이 지지할 사회학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사회학자들이 흔히 해온 작업이 사실로 취급되는 상식들이 어떻게 가치를 은닉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 상식에 기반한 설명이 사회적 행위 이론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합리적 선택 이론 뿐만 아니라 부르디외의 행위 이론이나 실용주의 이론 또한 이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행위 이론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상식에 근거한 설명을 와츠는 합리화 가능한 행위라고 부른다. 합리화 가능한 행위란 개인이나 집단의 행위가 의도, 믿음, 개인이 처한 상황과 주어진 기회들로 설명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물론 이는 사회 이론은 아니다. 이는 흔히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이해하는데 사용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사회적 행위 이론이 바로 이러한 상식에 기반한 설명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 설명 방식이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가 없다면 모르겠지만 이러한 설명 방식 때문에 사회 이론과 사회학적 설명이 인과적인 설명이 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는 사회 현상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에서 발생하는 근본적인 한계일 수 있다. 설명이 반드시 인과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사회학자라면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만약 상황이 달랐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응답하게 된다. 즉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만약 그 근거들이 지시하는 것들이 달랐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응답하는 것이다. 만약 설명에서 이런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면 그건 단순한 기술이나 스토리텔링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사회학적 설명은 이러한 인과적 설명이 아니라 “친숙하지 않은 것을 친숙한 것으로 축소"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해가능성과 인과성이 동등한 것이었다면 이러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해가능성과 인과성이 동등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와츠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를 제시한다.
프레임 문제
첫 번째 문제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대해서 멘탈 시뮬레이션을 해볼 때 시뮬레이션을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들과 디테일에 대해서 고려해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디테일을 채워넣는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디테일을 채워넣는다는 것 자체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런 디테일을 중요하지 않은 것, 무시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난 30년 간의 심리학과 행동경제학 연구가 보여주고 있다. 녹색 펜으로 좋아하는 스포츠 음료를 적어보라고 하면 게토레이의 비율이 높게 나온다. 와인 매장에서 독일 음악을 재생하면 독일 와인의 판매량이 증가한다. 경매 전에 큰 숫자를 생각해보라고 하면 경매에 더 높은 금액을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녹색 방에서 숫자에 대해 생각하면서 음악을 듣게 하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될지 분명하지 않다. 실험 환경에서는 한 가지 요인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많은 요인들이 다양한 크기로 존재하며 다양한 의사결정에 대해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요인들이 알려져 있지 않고,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알 수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철학자와 인지과학자들은 프레임 문제라고 불러왔다. 프레임 문제는 쉽게 말해서 의사결정자가 의사결정을 할 때 관련이 있었던 요인들을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자명해보이지만 이는 어려운 문제이다. 지금 현재 상황과 관련 있는 요인들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상황들과 비교해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다른 상황들과 비교해보려면 그 상황을 구성하는 요인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합리적 선택 이론의 지난 40년간의 역사는 이 프레임 문제와의 싸움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프레임 문제로 인해 합리적 선택 이론은 무엇이 합리적인 것인가에 대해 점점 더 포괄적인 정의를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주 적은 수의 공리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공리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자명해졌다. 끊임없이 어떤 요인들이 관련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정의는 점점 더 확장되었다. 정의가 확장될수록 의사결정의 계산과정을 추적하기는 더 어려워졌고 여전히 행동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인지과학자들도, 인공지능 연구자들도, 철학자들도 아직 프레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니 합리적 선택 이론가들이 프레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친숙한 상황에서 친숙한 행위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일상생활에서는 프레임 문제가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친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친숙하지 않은 행위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공간에 대해서는 프레임 문제가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사회학자들이 멘탈 시뮬레이션을 하는 대상은 바로 그 친숙하지 않은 공간이라는 것이다.
불확정성 문제
두 번째 문제는 사회학자들이 합리화 가능한 행위 개념을 개인에게 적용함과 동시에 집단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한 대표 행위자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집단적 행위에 대해서도 적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리 사회과학의 대표적인 성과는 행위자들이 집단적으로 상호작용할 때 행위자들의 특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창발적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그라노베터의 매우 단순한 의사결정의 역치 모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모형에서 군중의 구성원들은 “역치를 넘는 수의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면 폭동에 가담한다. 아니면 잠자코 있는다.“라는 단순한 규칙을 따른다고 가정하자. 역치가 확률분포를 따른다고 가정했을 때 그라노베터는 한 사람의 구성원의 역치가 바뀌는 것만으로도 집단적 차원의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모두가 폭동에 가담할 수도, 아무도 폭동에 가담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극적으로 다른 결과에 대해, 대표 행위자를 사용하는 합리화 가능한 행위에 기반한 설명은 군중의 어떤 내재적인 성향에서 원인을 찾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군중들이 어떤 의미있는 방식으로도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역치의 분포가 매우 다른 경우에도 다르지 않은 집단적 결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라노베터의 모형은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집단적 행위에서 사회적 상호작용이 존재할 때, 개인적 특성과 집단적 결과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미결정된 상태이며 구분할 수 없는 특성이 매우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도 있고 크게 다른 특성이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측되는 결과가 어떤 의도, 믿음, 그리고 기타 행위자가 연관되는 방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특정한 의도가 서로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으며 동일한 결과가 서로 다른 의도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따라서 어떤 결과를 보고 그 결과를 유발한 의도 등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 문제
합리화 가능한 행위의 세 번째 문제는 결과 개념을 인과적인 방식으로 다룰 때 발생한다. 우리는 쉽게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가 과거 혹은 미래를 생각할 때 어떤 결과가 어떤 의도와 관련되어 있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논문을 제출했을 때 고려하는 결과는 논문이 출판되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의사는 논문이 출판될 확률이 최대화되는 방식으로 논문을 쓰는 것이다. 또한 과거의 사건에 대한 의미부여는 이후 일어난 사건들에 의해 달라지게 된다. 논문이 리젝되면 그게 더 좋은 논문이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승진을 못한 것이 더 나은 커리어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실패한 관계가 더 나은 관계로 대체될 수도 있다. 반대로 처음엔 축복처럼 보였던 것이 나중에는 저주가 될 수도 있다. 사실 많은 경우에 이전에 좋은 혹은 나쁜 결과라고 생각했던 사건들이 돌이켜보면 결과가 아니라 진짜 결과 - 물론 회고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 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 있었던 중간 단계였던 경우가 많다.
더 큰 문제는 동일한 논리로 지금 시점의 평가가 과거 시점의 평가보다 정확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사학에 대해서 Danto (1965)가 제시했다. 어떤 사건의 중요성은 언제나 그 이후 사건들의 함수이기에, 그리고 그 누구도 이후에 일어날 사건들이 무엇일지, 그리고 또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어쩌면 첫 사건 이후 한참 지난 후에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시점에 역사를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HTML의 발명이 웹의 발명이었다고 말하려면 웹의 발명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것과 웹이 다른 언어가 아니라 HTML에 기반해 개발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웹의 중요성은 20년 동안 누적된 것들의 총합이므로 HTML의 역사적 중요성은 HTML이 개발된 그 시점에서는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발생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단순히 그 시점에 어떠한 것이 일어나고 있었다라는 정도의 주장을 하기 위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설명도 근본적으로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사학자의 지식에 의해 오염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HTML의 발명을 웹의 발명으로 기술하는 것은 Danto가 서사적 문장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존한다. 서사적 문장이란 어떤 시점에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라는 설명처럼 보이지만 미래의 지식의 도움을 받아 무엇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기술하기 위해 일종의 예지, 예언자적 능력을 동원하는 문장이다. Danto는 또한 서사적 문장이 단순히 사학자들에게 유용한 도구 정도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기술에 있어 불가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사적 문장이 없는 사학으로는 사학자들의 주된 목적인 과거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일어났는가가 그 이후에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의존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건은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만 기술될 수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사학적으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는 그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불가분하게 포함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사건을 그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지시 없이 기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무엇이 그 사건을 발생시켰는가에 대한 설명 또한 지금 분석하고 있는 결과를 넘어서는 결과에 대한 정보에 오염되게 된다. 또한 사건의 중요성이 완전하게 결정되는 종점 또한 존재할 수 없다. 과거에 대한 설명은 무기한적으로 수정될 수 있다. 미래와 과거가 유일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상황에 관계된 요인들을 완전하게 결정할 수 있다고 해도, 어떤 행위의 결과를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결정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문제들이 관찰된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는 것이 곧 인과적 설명이 된다는 가정을 깨뜨린다. 어쩌면 의도가 계획을, 계획이 행위를, 행위가 결과를 유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결과를 관측한 다음 관찰자가 그것을 행위자의 의도, 믿음, 상황, 그리고 기회를 통해 합리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행위자가 선택과 관련이 있는 미래의 상태에 대해서 모른다면, 만약 결과가 많은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확정적인 결과물이라면, 만약 결과에 대한 설명 자체가 그 이후에 발생한 사건들에 의존한다면, 설명하는 시점에서는 관계가 있어보이는 어떤 의도나 계획, 행위 등등을 사전적으로 알 수 있는가는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이해가능성에 의해 평가되는 개인적 혹은 집합적 행위는 최선의 경우에는 자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인과적일 것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아예 인과적이지 않을 것이다.
설명을 예측으로 재구성하기
동정적 방식의 이해가 사회학적 설명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사회학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없다. 이론적으로 가장 간단한 방법은 실험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험의 중요함과는 별개로 많은 경우에 사회학자들이 해결하려는 문제들에 대해서 실험하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실험의 자연스러운 대안은 인과추론을 위한 역사실적(counterfactual) 모형이다. 그러나 역사실적 모형의 문제는 모형의 가정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과적 효과는 관측 가능한 공변량에 조건화했을 때(conditioning) 발견될 수 있거나 혹은 모형의 기술과 관련된 에러가 무시 가능해야 한다. 따라서 관측 데이터에 대한 양적 분석에 기반한 많은 인과적 주장이 근거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실험과 통계적 모형의 추정에 대한 대안은 설명을 설명의 예측 능력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예측이란 특정한 사건을 거의 완전하게 예측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건 (X)가 발생했을 때 사건 (Y)의 확률이 변화한다는 것과 같은 확률적인 예측을 포함한다. 또한 예측이란 반드시 미래의 사건에 대해서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측은 과거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이 경우에 예측은 설명을 설명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 데이터가 아닌 다른 데이터에 대해 테스트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테스트는 외표본 검증이라고 알려져 있다. 외표본 검증은 가설 검증과 유사하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다르다. 첫 째로 가설 검증은 가설이 검증 이전에 기술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이는 사회과학에서 일상적으로 위배되고 있으며, 그 결과 많은 발견들이 모형의 과적합, 즉 모형이 샘플 데이터의 노이즈를 “설명"함으로써 발생한 잡음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외표본 검증을 사용함으로써 가설 검증의 많은 문제를 피할 수 있다. 또한 외표본 검증은 계수의 부호와 유의성에 대한 과도한 관심에서 모형의 퍼포먼스에 대한 관심으로 관심을 옮길 수 있다. 관측된 분산 중 얼마나 많은 분산을 설명하고 있는가? 계수의 부호가 예측된 방향과 같고 매우 유의하며 충분히 크다고 하더라도, 모형이 분산의 10% 정도 밖에 설명하지 못한다면 관측된 분산 중 대부분은 제안된 가설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예측이 인과적 설명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은 사회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인과성에 대한 관점과 일관된다. 이 문제를 보다 정확히 하기 위해 예측이 없는 인과적 설명, 다르게 말해 어떤 결과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제시하지만 그 설명이 바로 그 결과 외의 결과에 대해서는 예측하지 않고, 따라서 외표본 검정을 적용할 수 없는 설명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점검해보겠다. Mitchell (2004)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인과적 주장은 상당히 흔하다. Mitchell은 엔론 사태에 대한 많은 설명 - 물론 만약 (X)가 달랐다면이라는 어땠을 것인가라고 하는 인과적 설명일 때에만 의미가 있는 설명 - 이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교훈을 위해 사용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설명의 일반화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시했을 때 그 설명의 지지자들은 단지 그 사례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일반화 가능성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단지 솔직하지 못한 것인가? Mithcell은 그러한 설명의 지지자들이 자신들의 설명이 일반적인 역사실적 의미에서 만약 (X)가 달랐다면 파산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완화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추측한다. 그들의 오류는 문제의 역사실이 순수히 가설적이라는 것이다. 즉 분석자의 마음 속에서 수행한 (X)가 달랐다면 어떠했을 것인가라는 멘탈 시뮬레이션이었다. 그러한 역사실을 경험적으로 검증하는 것의 불가능성과 이전에 논의했던 것과 같은 멘탈 시뮬레이션의 문제들로 인해 그러한 “설명"은 결로 설명이 아니며, Mitchell이 인과적 이야기라고 부르는 것 - 인과성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건에 대한 기술이지만 그 어떤 근거도 없는 것 - 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인과적 이야기와 관련된 문제는 인과적 이야기가 Gelman과 Imbens (2013)이 반전된 인과적 질문, 즉 **왜?**라는 질문, 예를 들어 왜 엔론이 파산했는지, 왜 재임자들이 도전자들보다 더 많은 기부금을 받는지와 같은 질문, 에 대답하고 있다는 측면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Gelman과 Imbens는 이러한 질문들을 전진적 인과 추론의 질문들, 즉 사립학교과 미래 수입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혹은 정치적 홍보가 투표율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와 같은 만약 어떠했다면이라는 질문과 구분하고 있다. 두 종류의 질문들 모두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Gelman과 Imbens는 만약 어떠했다면이라는 질문만 인과 추론에서 받아들여지는 방법을 통해 직접적으로 답변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반대로 반전된 인과적 질문은 심지어 필요한 모든 데이터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잘 정의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간단하게 말해서 반전된 인과적 질문의 문제는 그러한 질문이 일반적으로 수많은 잠재적인 답변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그 답변들 각각은 전진적 가설로서 검증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가능한 설명을 동시에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상상한 역사실을 동원함으로써 인과적 이야기는 이러한 인과적 혼란들을 이해가능성의 덮개로 덮어버리지만 이러한 외양은 기만적인 것이다. 인과적 이야기가 외표본 예측을 수행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이 덮개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며 기만이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