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에게 정치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의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형태의 정치다. 끊임없이 토론하고, 상대를 존중하고, 협상과 양보를 통해서 서로 원하는 바를 (절충된 형태로) 이뤄내는. 이들에게 이상적인 정치는 이미 의회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문제는 대중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정치적 동역학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이 있다. 한 가지 답은 대중의 수준이 의회의 의원들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정치적 수준에 미달하기 때문에 계몽을 통해 대중의 정치적 수준을 고양해야 한다는 것. 다른 답은 대중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의회의 합리성과 대중의 열광을 구분하여 분리해야 한다는 것. 물론 전자의 답도 대중이 충분히 고양되기 전까지는 의회와 대중을 분리하는 것에 찬성할 것이다.

대중이 충분히 교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에게서 적과 아군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형태의 정치가 발생하는 것인가? 분명히 부분적으로는 그렇게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의회에 입성한 시민운동가가 정치라는 것이 생각한 것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거나 하는 사례가 바로 그런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대중과 의회는 일시적으로(대중이 계몽될 때까지) 혹은 영구적으로 안전하게 분리될 수 있는가? 폴라니 같은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자가 공격하는 지점은 이러한 분리가 사회에 실재하는 갈등, 대립, 권력과 억압의 역학을 분리시키고 이상적으로 상상된 형태의 정치 행위를 의회에 구현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적인 정치 체제 혹은 정치적 역학의 분리는 상당히 불안정한 형태가 된다.

다르게 말하면,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들이 상대를 존중하는 협상의 형태를 통해 해소될 수 있다면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제적이든, 윤리적인 측면에서든 타협이 불가능하고 (혹은 타협을 원하지 않고) 권력과 억압을 통해서만 조정될 수 있는 문제는 언제나 존재한다.

현실에서 협상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정치 행위로 여기는 자유주의자들조차 자신이 원하는 것은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당연히, 마땅히 수용해야 할 것이지만 네가 원하는 것은 나와 협상해야만 한다라는 스탠스를 취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지 않은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협상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그 문제는 어느 한쪽의 결국 권력과 억압을 통해 해소되게 된다.

물론 이런 개념적인 차원에서의 문제 말고도 의회와 대중의 분리가 불가능한 현실적인 이유는 더 있다. 그런 식의 분리는 대중을 동원해 의회 정치를 타격하려는 위험을 끊임 없이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종종 강력한 공권력이 동원되는 경우는 흔히 관찰되는 것이다.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는 그렇게 부당한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민주적이라고 긍정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