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다수 포함

2시간을 금방 보내기는 했는데 보고 나서 바로 든 생각은 어 이걸로 끝?에 가까웠다. 스토리는 굉장히 단순하고 예상 가능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너무 예상하기 쉬운 내용이라 오히려 예상이 어긋나는 느낌이 있다. 여기서 스토리를 이렇게 비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스토리는 아무런 비틀림 없이 나아간다.

예컨대 동물해방전선(ALF). 영화에서 이런 집단이 나오면 당연히 나름의 꿍꿍이와 어두운 면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지만 옥자에서 ALF는 그냥 좀 얼이 빠진 인간들일 뿐 특별히 미자를 대단하게 이용하겠다거나 하는 생각을 할만한 위인들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서 너무 진지하게 PC한 소리를 하는 부류에 가깝다. 제이는 진짜로 모든 생명을 존중해서 낸시 미란도가 악마적인 모습을 보일 때에나 너만은 생명으로서 존중하지 않겠다는 소리를 하는 위인이고, 미자의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죄로 영화에 나온 모든 인간들 중에서 가장 많이 두들겨 맞고 영구 제명당하고 장비까지 뺏긴 케이는 그걸로 무슨 대단한 원한을 품고 배신하기보다는 오히려 절체절명의 순간에 제이와 미자를 구하러 나타난다. 팔뚝에 명백히 설국열차의 패러디인 것 같은 ‘번역은 신성하다’라는 문신을 새기고서. (물론 번역이라는 것이 갖는 철학적 무게를 생각하면 조금 더 의미심장하긴 하겠지만.) 사실 그런 식으로 비트는 것도 이젠 클리셰라고 할만큼 흔해졌기 때문에 그런 올곧은 서사가 오히려 더 바람직한 것인지도 모른다.

스토리가 올곧은 것은 그렇다치고, 그냥 보면 영화는 단순히 동물과의 우애와 그에 대비되는 공장식 축산 등을 고발하고 있는 정도로 보인다. 물론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공장식 축산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꽤 있는지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면 꽤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사실 영화를 본 직후에는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조금 지나서 생각해보자면 떠오르는 것은 수많은 아이러니다. 루시 미란도의 악행이란 슈퍼 돼지가 유전자 조작 동물이라는 것을 숨겼다는 것 정도다. 그 외에 슈퍼 돼지는 실제로 적게 먹고 배설물도 적고 맛도 있었다. 꽤 환경친화적인 발명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지극히 자아도취에 빠져있었던 덕에 오히려 대중에게 보여지는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상당히 노력한다. 자본의 환경주의에 대한 타협이라고 할 수도 있고 상당부분 환경주의에 경도된 자본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ALF는 루시 미란도를 사이코패스로 간주하고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중에 비치는 이미지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오히려 대중을 조작하는 것에 능숙한 (‘어차피 싸면 다 사 먹어’) 낸시 미란도로 루시 미란도를 대체해버리는데 일조하게 된다. 그렇다면 ALF에게 큰 잘못이 있었던 것인가? ALF에게 문제가 있었다면 루시 미란도가 그랬던 것처럼 유전자 조작 동물, 동물 학대 등의 이미지가 대중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한 정도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ALF는 옥자를 구해낸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 뭐 결과적으로는 한 마리의 슈퍼 돼지를 더 구해낼 수 있었지만.

반대로 루시 미란도가 대중에 비치는 이미지와 프로모션을 중시했기 때문에 옥자는 미국에 가게 되었고 사건의 단초가 되게 되었다. 루시 미란도가 홍보에 집착했기 때문에 황금 돼지 정도의 값으로는 옥자를 살 수 없었고, 반대로 낸시 미란도는 지극히 비용과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비즈니스인이기에 옥자라는 슈퍼 돼지 한 마리 정도는 더 비싼 황금 돼지와 교환할 의사가 충분했다. 결국 옥자를 구해내는 정도가 전부라는 결말로 진행되면서 이런저런 아이러니가 발생했고, 그게 한 번 더 짚게 되는 것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는 감독의 전작 설국열차를 연상하게 한다. 주인공 커티스가 열차라는 세상과 사회이자 시스템이 돌아가는 원리를 직면하면서 압도되어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게 될뻔한 것처럼. 물론 커티스는 그 완벽해보이는 체계의 모순을 발견해내고 그 체계를 완전히 전복해버리는 것에 성공하지만 옥자의 반역자들에겐 그런 행운이 주어지지 않는다.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고, 유전자 조작 동물이라는 진실과 그 참상 정도는 대중이라는 체제에 완전히 압도당해버렸으며, 철저하게 PC했던 제이는 존중받을 필요가 없는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버리고, 마침내 마지막 장면에서는 ALF와 대규모 시위 같은 것에는 흥미를 잃어버린 뒤 미란도의 중역들이 오는가, 낸시 미란도가 오는가 하는 정도에만 관심을 보이는 음울한 모습으로 전락한다. 처음부터 불안정하고 다중인격적이었던 조니 박사는 생계에 대한 압박 속에서 동물을 사랑하는지 증오하는지 알 수 없는 위태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아마도 해고되었을 것이다.) ALF는 옥자 밖에 구해내지 못했고, 처음부터 옥자를 구해내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미자에겐 결국 죽어가게 될 수많은 슈퍼 돼지의 울음소리들과 그 울음소리의 증거인 새끼 슈퍼 돼지가 남겨졌다.

그러니까 설국열차가 압도적인 세상 속에서도 결국은 그 세상을 전복해내는 과거의 혁명담이었다면, 옥자는 그 압도적인 세상 속에서 발버둥쳐보지만 결국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는 오늘날의 혁명담에 가깝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더 여운이 남는 것이라면, 미자와 옥자가 찍힌 사진을 보면서 동요하는 도축장 직원의 모습들 같은 것 정도인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