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세상. 영화에서는 수수께끼 같다는 말로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세상을 명료하게 설명해서 글로 옮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진실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보일이라는 고양이는 정말로 있었던 것일까? 있었던 것처럼 묘사되지만 당최 그 좁은 방에서 고양이가 어디 숨어있을 수 있었다는 것일까? 해미의 집에는 정말로 우물이 있었을까? 해미는 있었다고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해미의 어머니와 해미의 언니도, 마을 이장도 우물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냥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지 않은가 생각할 수 있는 시점에 종수의 어머니가 나타나 마른 우물이 있었다는 말을 꺼낸다. 대체 걸려오지만 말이 없는 전화는 무엇이었을까? 전부 종수의 어머니가 한 것이었을까? 태워진 비닐하우스가 없지만 벤은 종수에게 아주 가까이 있는 비닐하우스를 이미 태웠다고 말한다. 벤이 대체 무엇을 하는 인간인지, 벤이 정말로 해미를 죽였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기라도 했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 영화는 확답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은 정말로 수수께끼 같은 대상이며 세상에 대해 명료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은 수수께끼 같다는 것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제각기 명료한 설명들을 내놓고 그렇게 설명된 이치로 세상사에 대해 확언하고 그 이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그 이치를 타파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지만,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쉽게 이해될 수 있을만큼 명료한 대상이 아니며, 그것에 대한 명료한 설명들은 세상의 일부만을 반영하는 것이거나 혹은 아예 오해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명료한 설명 방식 중 하나를 사용하면 버닝 또한 아주 단순하게 설명될 수 있다. 비루하고 비참한 20대 청년의 삶. 영화는 일부러 TV에서 청년실업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흘려보낸다. 트럼프 같은 인간이 대통령이 되어 미국제일주의를 말하는 세계, 구직자들을 번호붙여서 야근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나 따지고 있는 세상, 다행스럽게도 싱크대 옆에 변기가 붙어있지는 않은 정도의 볕들지 않은 방에서 가끔 흐릿하게 남산 타워에 반사된 빛을 쬐어야 하는 삶.

그러나 반대로, 종수보다 6,7 살 정도 밖에 많지 않은 벤은 어떤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포르쉐를 몰고 미식을 탐하고 한가한 사교 모임에나 참석하면서 클럽에 가고 대마초를 피우며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기 심장에서 느껴지는 베이스를 따르면 된다고, 모든 것에서 재미가 가장 우선인 천박한 인간. 한국에 너무나 많은 개츠비 같은 인간인 벤은 한국의 모순을 상징하는 존재이고, 그에게 카드빚에 시달리면서도 삶의 의미에 굶주린 그레이트 헝거를 동경하는 해미는 잠깐 만나는 것이 재미있어서 만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져도 별 문제는 없는, 그 대체재를 바로 찾을 수 있는 정도의 존재이다. 그는 마치 파스타처럼 파스타든 여자든 자신의 뜻대로 꾸며서 신인 자신이 제물로 먹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인간이다. (파스타를 만드는 장면에서 이런 대사를 읊으면서 메타포라고 말하는 것을 고려하면서, 영화의 막바지에 대체된 여자를 메이크업하는 장면을 병치하면 그게 어떤 종류의 의미인지 알 수 있다.) 용산참사에 대한 예술이 부르주아들의 허영을 충족시키기 위해 복무하고 있는 그 공간에서 식사를 즐기는 바로 그 부르주아이다. 그는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고 그래서 슬프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자신의 감정이 정말로 슬픈 것인지 확신할수조차 없는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인간이자 공허한 인간이다. 물론 해미 같은 대체 가능한 존재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같은 하층민인 종수라는 사실에 약간 질투를 느낄 수 있는 정도의 감정은 있다. 실제로 많은 상류층들이 하류층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질투하기도 하는 것처럼. 종수와 벤의 구도는 한국의 모순을 집결한 듯한 구도이고, 그래서 그런 시각으로 본다면 영화는 너무나 명료해진다. 종수가 벤에 대해 이해하게 된 순간 수수께기 같았던 세상이 명료해지고 마침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으며, 벤을 죽이고 그의 포르쉐와 자신의 비루한 처지와 낡은 과거의 자신을 상징하는 옷과 함께 불살라버리는 것으로 시스템의 전복을 맛본다.

(단 벤을 현실의 악의 결정체 정도로 취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일단 이 영화는 그렇게 명료한 정보를 제공하고 판단을 내리려는 종류의 영화는 아니며, 벤이라는 인물 자체도 그 나름대로 재미있는 점이 있다. 다소 교과서적이지만 무엇보다도 쾌락우선적으로 살아가는 동시에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무료해진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조금씩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교 모임에서 하품하는 장면이나 비닐하우스 불태우기 같은 극단적인 경험을 추구하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그런 서사 자체로는 너무나 단순하고 단조로운 것이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모호한 세상에 대한 명료한 설명처럼 모호함을 풀어놓은 영화에 대한 너무나 명료한 설명이 된다. 물론 그렇다고 이러한 구도와 속성들을 발견하는 것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비루하고 비참한 삶과 그것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려고 발버둥치는 삶들이 장난감 정도로 여겨지는 바로 그것이 어쨌든 수수께기 같은 세상의 일부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쾌한 대립구도와 장면들을 관통하는 서사 같은 것 이전에 그런 수수께끼 같은 장면들이 시시각각 들이닥치고 있는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종류의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근원적 모순을 아는가 모르는가 같은 것과는 별개로, 그 이전에, 그러한 불가해하고 수수께끼 같은 사건들이 오늘날의 삶에 들이닥치고 있으며 그런 혼란스러움을 맞닥뜨리고 있는 이들이 말 한 마디 할 수 없는 (그러니까 글 한 줄 쓸 수 없는, 무엇을 써야할지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놓여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혹은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종류의 것들이다.

물론 해미와 종수는 그런 수수께끼 같은 삶에 맞닥뜨리고 있는 두 종류의 인간이다. 해미는 종수조차 모르는 카드빚에 시달리고 있는 동시에 고양이를 키우고 돈을 모아 아프리카로 여행을 간다. 그것을 통해 꿈꾸는 것은 그레이트 헝거. 단순히 먹지 못해서 시달리는 허기인 리틀 헝거(즉, 돈이 없다는 것에서 생겨난 고통)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고자하는 허기를 충족하고자 하는 것이다. 부시맨들의 춤이 리틀 헝거에서 시작해서 그레이트 헝거로 끝난다는 것은 그러한 해미의 상태를 단적으로 시사한다. 즉 돈이 없음으로 인해 생겨난 고통이 삶의 의미에 대해 회의하게 되는 고통으로 이어진 상태. 그를 위로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 키우는 고양이조차 영화는 대놓고 자폐증에 걸린 고양이라고 말한다. 그 상태에서 그 허기를 잊고자 정신적인 탈출구를 찾으려 노력하지만 그건 부유한 이들의 눈에는 구경거리 정도로 여겨질 정도의 것에 불과하다. 사교 모임에서 해미가 춤추는 것을 재롱을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모임의 참석자들의 시선들을 보라. 영화는 스스로 정신적으로 고양된 해답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잔인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그런 것은 그저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겹고 졸린 것이기도 하다. (정신적인 고양 같은 것을 찾아 방황한다거나 혹은 그걸 진지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을 지켜본 사람에게는, 혹은 정신적인 자기계발 혹은 행복 추구 같은 것이 유행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잔인한 장면일 것이다.)

영화는 거기에 오늘날 여성들이 겪는 문제들까지 도입시킨다. 야외에서 같이 춤을 추는 동료가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고 하잖아요, 라는 말로 짧게 시사하는 동시에, 사교 모임에서 중국 남자나 만나볼까봐 중국 남자들이 여자한테 그렇게 잘 한다잖아 하는 말로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나오는 말들을 조소하기도 한다.

종수는 다소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인간형이다.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라고 표현되는)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존재이며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 시달리다 남매를 버리고 도망치고는 십수 년이 지난 후에 돈이 필요해지자 아들을 불러놓고 돈을 달라고 요구하면서도 아들이 아닌 다른 인간과의 카톡에 정신이 팔려 있는 정도의 인간이다. 그런 부모와 경제적 상황 속에서 종수의 내면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창고 속 금고에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칼들이 걸려있는 모습과 같은 너무나 직접적인 메타포로 전달되고 있다. (물론 이 칼들이 걸려있는 상자는 벤의 메이크업 도구가 들어있는 상자와 대비되고 있다.) 해미와 관계하면서도 해미를 바라보지 못하고 잠깐 들어오는 빛에 시선이 옮겨가는, 그 약간의 빛을 비춰주는 남산 타워를 올려다보면서 자위하는 비루한 존재이다. 늘 지쳐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구직을 하러 참가한 자리에서도 넋을 잃은 것처럼 흐리멍덩하기만 하다.

버닝은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서 방황하고 고통받는 삶들의 모습과 그들이 그러한 수수께끼를 자아내는 현실에 부딪치는 과정들을 보여준다. 그것을 단순히 보여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것을 조소당하는 장면 속에 넣어 조소하는 것으로 그러한 삶들의 비참함과 비루함을 더 강렬하게 만든다. 그리고 실은 왜 그러한 비참함에 처했는가에 대한 설명을 모색하는 것만큼이나, 혹은 그것 이상으로 바로 그러한 비참함에 던져진 개인들의 경험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환자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수집하지 않고 진단부터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나 얼마나 많은 설명과 주장들이 진단부터 내리려고 들었는지!

그래서 그 두 삶은 연기처럼 사라지거나 혹은 세상이 수수께끼 같다는 것을 직면하게 하는 대상, 더 나아가 자신에게 얼마 남아있지 않은 것조차 장난감처럼 빼앗아간 (혹은 빼앗아갔다고 생각되는) 대상을 칼로 찌르고 불태워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해미를 사랑하고 있다고 절규하는 장면은 해미가 자신이 아닌 이들, 특히 벤에게는 장난감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것도 시사하는 것이다.) 연기도 결국 불의 결과이니 어떠한 방식으로든 불태우거나 불태워지는 것으로 종결된 것이다. 불태운다는 것이 문학에서, 특히 유미주의적인 측면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라든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지옥변이라든지) 많은 메타포로 쓰인다는 것을 고려하면 (또 종수가 작가지망생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마지막 장면에서의 불태우기는 많은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시스템에 전복이라고 할 수도 있고 분노 그 자체의 표현이거나 혹은 파괴적인 종류의 영감 혹은 열정, 증오, 또는 행위하겠다는 의지 혹은 결단과 행위 그 자체, 혹은 악마주의적인 시도 등등. 사실 영화 내에서 불태운다는 것 자체가 여러 맥락에서 등장하기 때문에, 즉 벤의 비닐하우스 불태우기과 그것을 범죄적 행위임에도 마치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은 자연적 현상과 같은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 종수의 아버지가 종수에게 종수의 어머니의 옷을 불태우게 한 것, (종수의 어머니는 불쾌한 종류의 인간형인 동시에 해미와 함께 우물이 있었다고 말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연결점을 갖고 있다.) 종수가 비닐하우스가 불타는 것을 바라보며 매료되는 꿈을 꾸는 것, 비닐하우스에 실제로 불을 붙여보는 것, 어떤 비닐하우스가 언제 불탈지 같은 것에 대해 집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 등등에서 등장하기 때문에 어떤 측면에서까지 볼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삶의 수수께끼를 서사와 장치의 수수께끼로 반영하고 있는 영화인 것을 고려해볼 때, 그러한 모든 가능성들을 하나의 수수께끼로서 이리저리 생각해보는 것이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