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거인은 우익적 혹은 극우적인가? 보통 일본의 창작물이 극우적인가를 논하는 기준은 욱일기가 은근슬쩍 등장한다든지 혹은 대체역사물 같이 노골적으로 (유치한) 욕망을 드러낸다든지 하는 식인 경우가 많다. 어쨌든 그런 사례들을 극우적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그건 대체로 별 생각이 없어서였다거나, 생각이 있었더라고 해도 그게 욕망을 초저도로 발산한 것 정도에 불과한 것이 많기 때문에 무어라 논할 가치조차 별로 없다.

진격의 거인은 이런 측면에서는, 민감한 지점들까지 건드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식의 얕은 극우적 욕망을 내놓고 드러내는 작품은 아니다.

진격의 거인은 우익적 혹은 극우적인가? 그렇지만 진격의 거인에는 분명히 극우적인 발상이 있다. 정확하게는 극우적인 발상이라기보다는 극우들이 보통 선호하는 종류의 발상이 있다. 작가는 그 발상을 아주 직접적이고 반복적으로 그리고 여러 각도에서 도입한다.

그것은 나, 혹은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는 상대, 혹은 적이 죽어야 한다는 발상이다.

처음 미카사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범죄자들을 살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나, 혹은 거인과 벽 안 인류가 싸울 때까지는 이 요소가 은연 중에 느껴지기는 하지만 적나라하지는 않다. 어쨌든 아직은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거나 혹은 범죄자들인 것이 아닌가? 2부에서 마레가 엘디아인들을 세계의 안녕을 위해 사라져야할 존재로 간주하는 장면들, 혹은 과거 마레가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엘디아인들과 싸우고 그들을 수용구에 격리한다는 점에서도 좀 더 꺼림칙해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아주 직접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이 메시지는 아주 명확해진다.

마레, 그리고 나머지 세계 전체가 엘디아인들, 특히 파라디 섬 안의 엘디아인들의 죽음을 원하고 있고 제한된 시간 안에 그들과 화해하기는 불가능해보인다. 이제 엘디아인들의 자유를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의 결론은 세계 전체와 싸우는 것, 더 적나라하게는 세계 전체를 살해하고 대지 위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저 그냥 평범하고 안온하게 살아가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그러한 삶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은 바로 그 문제 정도를 위해서도 인류를 살해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벽 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면 나았을 것을, 그러지 않고 인류가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에 실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발상이 드러나고 그것이 땅울림이라는 식으로 실제화되자 다시 한 번 엘런 예거에 대해 자신들의 삶과 생명과 자유를 위해서는 그를 살해해야만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미카사는 그런 선택의 자유를 위해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대상인 엘런을 스스로 살해해야 했다. 그리고 유미르는 그 살해의 장면 속에서 프리츠 왕에 대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학살의 끔찍함을 보여주는 장면조차도 그래서 엘런의 선택이 옳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작가의 비판적 장치 따위라고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상대에 대한 동점을 갖고 있고 그러한 선택이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 자유, 혹은 좀 더 원초적인 것, 그저 삶의 지속을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각한다. 그것은 미카사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지만 그를 살해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처하고 실제로 그러했다는 것이, 그런 상황이 따라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가 아닌 것과 같다.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가 복수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참혹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과연 이렇게 밀어붙여도 좋은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했다면, 진격의 거인은 그럼에도 그것을 밀어붙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하고 싶었던 것들은 이미 최종화 이전에 마무리가 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아마 비극적인 결말이었다면 좀 더 표면적인 완성도는 높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최종화 자체가 사족 정도인 형국이라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최종화는 거의 고의적인 수준으로 장난 혹은 조롱처럼 보이는 점들이 많은데,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기 어려운 점이 있다. 단순히 별로 하고 싶지 않았던 작업이었기 때문에? 혹은 이런 조롱을 최후에 배치함으로써 자신이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메시지를 비웃기 위해? 자유를 위해 적을 살해해야 한다는 발상을 부조리하고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위해? 그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런 결말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맞추는 놀이를 하는 것은 그다지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다. 그건 그냥 그렇게 남겨놓고, 결말 직전까지 밀어붙였던 자유를 위해서 적을 살해해야 한다는 발상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쪽이 더 흥미로울 듯 싶다.

사람들이 가장 당혹스럽게 여기는 것이 바로 이 발상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이전부터 이미 충분히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지만 결말에서 어떻게 수습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 기대가 엇나가자 이 메시지가 주는 엄청난 위화감이 바로 표면으로 올라온 것이다. 과연 소년만화(진격의 거인을 소년만화라고 지칭하는 것이 얼마나 적절할지는 잘 모르겠지만)에서 던지는 메시지로서는 아주 과격하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생경해햐는 것처럼 새로운 발상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위선적이다.

이 이야기는 픽션이며,
실존하는 사건, 단체, 인물과의
어떠한 유사성도 필연의 일치다
하지만 현실 쪽이 훨씬 더 무자비하다
amazarashi - 독백

이미 자신의 자유, 아니, 사실은 자유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그저 자신의 기분을 위해 타인이 고통에 처하거나 혹은 살해당하는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 혹은 그것을 열렬히 찬성할 준비가 되어있는 종류의 인간은 이미 세상에 넘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인종, 혹은 다른 국가, 집단, 지역, 성별, 그들의 고통, 혹은 삶, 생명보다 자신의 약간의 심기가 더 중요하게 간주되는 경우는 이미 충분히 많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더 놀라운 메시지일 수 있을까? 자신들의 자유와 그 자유를 위협하는 실제적인 적을 가정하는 진격의 거인은 차라리 실제로 절박한 상황에 처해져 있다고 할 수 있기라도 하지, 현실에서 수많은 이들이 무관심하게 여기는 상대 혹은 타자의 삶은 그들의 자유 따위를 실제로 위협하는 적인 것조차 아니다.

어쨌든 진격의 거인은 픽션이고 그 세계에서 인류의 80%가 죽어갔지만 실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실제 사람들의 삶을 박탈할 준비가 되어있는 세상과 그 거주자들이 왜 그것에 놀라는 것인가?

그런 부박한 종류의 문제를 치워버리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끌어오도록 하자. 자유를 위해서는 적을 살해해야 한다는 발상은 타당한 것인가? 여기서 자유를 위해서는 적을 살해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윤리적인 측면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우리의 세계는 자유를 위해서 적을 살해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형태로 구조화되어있는가? 그런 형태의 문제들이 끊임없이 주어지고 있는 것인가? 정말로 세계는 잔혹한 것인가?

이것조차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 개인의 가치관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는 종류의 것이겠지만, 세상이 각 개인들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고, 화해는 드물며, 여러분의 삶을 조롱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들을 마주하는 것이 그렇게 드물지 않다는 것은 아마 인정하는 쪽이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