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
오랜만에 좋은 게임을 했다. 새삼스럽지만 게임은 굉장히 강력한 스토리텔링의 수단이라는 생각을 한다. 게임 플레이와 섞이기 때문에 서사의 밀도가 높지는 않겠지만 20시간 이상 관객을 몰입시키면서 특정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된 감상.
페인트리스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혹은 2막에서 나온 힌트들에서부터 게임 속 세계가 그림과 관련된 무언가이거나 혹은 그림 속 세계일 수 있다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사소한 계기와 사건이 세계의 진실과 연결되는 JRPG 특유의 문법에 익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동시에 드는 우려는 과연 그런 소재를 게임이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소위 꿈 엔딩은 마치 유혹처럼 많은 창작자들이 시도하지만 동시에 많은 경우에 굉장한 반발을 일으키는 것이다. 당연하다. 많은 시간을 들여 몰입한 이야기가 모두 헛것이었다는 마무리를 좋아할 이들이 있을까?
그리고 마찬가지로 클레르 옵스퀴르의 3막, 그리고 엔딩이 바로 이 때문에 논란이 큰 것 같다.
이렇게 위험한 꿈 엔딩이 왕왕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나쁜 이유는 창작자가 이야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마무리를 짓지 못해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클레르 옵스퀴르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클레르 옵스퀴르의 “꿈 엔딩"은 이야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바로 이 꿈 엔딩이 클레르 옵스퀴르의 엔딩을 아주 강렬하게 만든다.
위에서 썼듯 이 엔딩이 많은 논란이 되고 있지만, 나는 내가 접한 많지 않은 게임들 중에서 독보적일 정도로 강렬하고 훌륭한 엔딩이라고 생각한다. 두 엔딩 모두.
이야기에 조금 더 깊게 들어가자면.
2막 후반과 3막을 진행하다 보면 마엘 혹은 알리시아의 아버지 르누아르에 대해 굉장히 미묘한 느낌을 받게 된다. 르누아르 자체는 전형적인 아버지의 질서를 상징하는 캐릭터이다. 딸아, 현실 도피는 그만하고 현실을 살아야지. 그런 현실에 대한 질서. 마엘은 그에 대해 당연히 반발한다. 칼로 아버지를 찌르는 노골적인 부친 살해의 모티프도 등장한다.
그런데 이런 부친 살해 모티프, 그리고 환상에 대해 관용적인 어머니상이라는 전형적인 구도를 마냥 전복적인 것으로 간주하기가 어렵다. (물론 이 모티프 자체가 닳고 닳긴 했다.) 르누아르의 생각이 지나치게 정론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어머니 알린의 욕망은 사도에 가깝다.
현실을 마주하고 현실을 살아가자는 생각을 어떻게 틀렸다고 할 수 있겠는가? 반대로 상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가상 속에서의 시간을 연장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어떻게 긍정할 수 있겠는가? 3막을 플레이하면 이 의문을 피할 수가 없고 이는 엔딩에서 극적인 방식으로 해소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강제로나마 그림 속에서 빠져나오게 되는 베르소 엔딩을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 난해한 문제에 대한 게임의 힌트는 엔딩 밖의, 그리고 아버지 르누아르와 어머니 알린을 제외한 다른 가족인 클레아와 베르소에게서 얻을 수 있다. 일단 클레아부터. 끝없는 탑의 대사를 생각하자면.
충고 하나만 할게. 다른 사람의 사건에 너무 휩쓸리지 마.
두 사람 다 아직 꼭 필요한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았어.
슬픔을 마주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냥 떨어져 있는 게 나아.
그런데도… 이러고 있지. 다른 사람들까지 난장판에 끌어들이면서.
너처럼. 그녀의 망상에 갇혀서.
날 위선자라고 부를까 봐 하는 얘긴데, 그래, 나도 관계가 있어.
…
하지만 도와주는 것과 휘말리는 것에는 차이가 있어.
이건 네 싸움이 아니야. 그들의 말썽에 휘말리지 마.
어머니는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차라리 환상에 빠져드는 쪽을 택할 거야.
어머니가 저항할 수 없는 약물이지. 같은 실수를 하지는 마.
아버지는… 가족을 더 잃는 걸 두려워하고 있어.
그래서 모두가 자기 뜻을 따르게 하려고 했지. 아버지의 공포가 너까지 조종하게 해서는 안 돼.
스스로 선택하는 건 이기적인 게 아니야, 동생아.
마지막 본 이후로 많이 성장했구나.
뒤로 가지는 마.
…
네 삶은 네가 통제한다는 걸 상기시켜 줄 거야.
그리고 재미가 없다면… 그냥 다른 일을 해.
재미있었길 바라. 잊지 마…
네가 빚진 건, 즐거운 삶을 사는 것뿐이야.
아버지와 어머니 둘 다 올바른 길은 아니다. 그들의 선택에 따르는 것은 그들에게 휘말리는 것이다. 자신이 선택해야 하고 스스로의 삶을 통제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선택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는 것 같다. 그림 안에서 계속 머무는 것, 그림 밖으로 나서는 것, 이 둘 외에 무엇이 있단 말인가? 뒤로 가지 않고 나아간다면 당연히 그림 밖으로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 가지가 있다. 돕는 것과 마찬가지로 휘말리는 것과는 구분되는 것.
그건 재미있게 즐기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클레아 그 자신과 베르소가 그림 속의 모험을 즐겼던 것처럼.
비행 저택의 베르소의 대사를 빌리자면.
그녀가…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이 그림이 고통받게 하진 않았겠지.
그림이든 아니든, 그녀에겐 감정과 영혼이 있었어.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그녀 생각은 다르겠지.
내겐 이 캔버스 안의 모든 게 밖에 있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어.
에스키에, 제스트랄, 그랑디스, 알린의 그림들까지.
난 그들 모두를 환영해. 그림은 축제가 되어야 해.
음악처럼…
…
너 자신을 보살펴. 네 주위의 그림들도.
그래서 마엘 엔딩에 단순한 현실 회피 이상의 의미가 있다. 마엘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그림 속 세계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뤼미에르에서 시간을 더 보낼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간이 반드시 영구적일 것이라고 간주할 필요는 없다. 마엘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조금 더 즐길 수 있는 시간일 수 있다. 여기서 즐긴다는 것은 현실을 도피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즐긴다는 것은, 물른 그조차도 포함해서, 그보다는 이 모든 사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시간을 유예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리고 충분히 즐겨 이제 재미가 없어졌다면 다른 일을 하러 가면 된다. 단순히 그러지 않을 수 있는 여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에 따른 결론이라면 이 허비 같은 시간도 얼마든지 좋다.
그리고 그것이 르누아르가 마지막 순간에 통제 대신 자신의 딸을 한 번 믿어보기로 생각한 - 단순히 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서만이 아니라 - 이유일 것이다.
과연 인간은 설령 그것이 달갑지 않더라도 진실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무언가가 허구라고 했을 때 그것을 곧 가치 없는 것 혹은 무의미한 것으로 동치시키기 쉽다. 그러나 그 동안의 경험과 감정은 그 자체로 사실이다. 그 감정의 끝에 그것이 허구였다고 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 경험을 모두 무의미한 것 혹은 지나치면 그만인 것으로 치부할 필요는 없다.
이 게임이 허구이지만 그 허구가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논쟁하게 할 정도로 감정을 촉발시키는 것처럼.
사람은 진실을 추구하기에 경험과 감정의 내용 그 자체보다는 이성적인 정답에 방점을 찍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런 즐기는 시간들을 생략하고 빠르게 결론, 현실로 나아갔다로 도달한다면 그쪽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경험 그 자체 또한 존중될 필요 또한 있다. 정답이 있다고 해서 한 번에 그 정답으로 질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베르소 엔딩에서 뤼미에르의 사람들과 에스키에, 모노코와 작별하는 것을 이미 이 정답으로 마무리된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끌려 나왔기에 그 경험과 감정에 대한 마무리를 할 시간이 마엘, 혹은 알리시아에게 앞으로 필요할 것이라는 은유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아직 마엘이 에스키에의 인형을 안고 있는 것처럼.
1막과 2막에서 세계의 운명을 위해 투쟁하던 모험담을 3막에서 가족 싸움에 휘말린 물감 얼룩 정도로 만들어버렸다는 평이 많고, 솔직히 나도 플레이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세상에 대한 이야기에서 가족 내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하는 위험천만한 시도를 한다니. 이 점에서는 통상적인 JRPG와는 반대라고 할 수 있겠다. 가족에서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족으로 진행하는 것), 바로 그 경험이 마엘에게 이 경험을 존중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플레이어에게도).
장송의 프리렌에서 프리렌은 힘멜을 기억하기 위해 (인간의 기준에서) 어마어마한 시간을 사용한다. 그 시간이 자신보다 훨씬 무게 있을 페른과 슈타르크 까지 휘말리게 해서. 장송의 프리렌에도 오레올에 도달한 이후의 결말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결말에 도달하고 난다고 해서, 혹은 심지어 그 결말을 어떻게 미리 알게 된다고 해서, 그 이전까지의 과정이 그저 그 결말에 도달하기 위한 것 정도에 불과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한 인생을 같이 보내고 세계를 구하기 위해 모험했던 그 경험을 이제 존중해야만 한다. 그를 위해서는 이미 모험이 끝난 후에 돌이켜 다시 오레올로 떠나는 여정이 필요하다. 마엘 엔딩에서처럼 아직 그림 안에서건, 베르소 엔딩에서처럼 그림 밖으로 던져진 이후에서건. 그렇기에 (어떤 사람들이 바라는 것처럼) 1막과 2막의 이야기에 대해 더 적절한 다른 결말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3막과 엔딩에 대해서는 1막과 2막의 이야기가 더없이 적절하다.
나는 마엘, 혹은 알리시아가 이후에 자신의 그림 혹은 글을 쓰게 되는 것을 상상한다. 그림이라는 아이디어가 상징하듯 이 이야기가 또한 창작에 대한 메타포라고 생각한다면, 그와 같은 창작을 즐기고 여운까지 마무리 되었을 때 그 작품과 감정을 존중하는 방법 중 하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런 글을 써야만 하는 충동에 휘말린 이유일 것이다.